비가 내리고 있었다. 6월의 장맛비는 참 억울하게도 내 기분과 꼭 맞았다. S전자 인적성 결과 발표일. 아침부터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에 땀이 촉촉이 배어있었다. 메일함을 새로고침 할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김준호 님, 안타깝게도...'
더 읽을 필요도 없었다. 3년째 보는 문장의 패턴이 눈에 익었다. 안타깝게도, 유감스럽게도, 아쉽게도... 그들의 유감은 진짜일까? 내 인생의 유감을 그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강남역 지하철 입구 앞에서, 우산도 제대로 쓰지 않은 채 비를 맞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바쁘게 뛰어가는 회사원, 졸린 눈으로 학교로 향하는 대학생, 그리고 나처럼 표정 없는 얼굴의 사람들. 그들도 취준생일까?
28살, 지방 국립대 경영학과 졸업, 토익 920점, 컴퓨터활용능력 1급, 각종 자격증과 봉사활동, 인턴경험까지... 내 스펙은 전국 취준생의 평균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었다. 평균은 넘는데 왜 합격은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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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야, 이번엔 어땠어?"
어머니의 전화였다.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매번 내 면접 결과를 기다리는 부모님의 마음이 어떨지 이제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이번에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참 무거웠다.
"괜찮아, 아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야. 옆집 최씨네 아들도 재수 끝에 삼성 들어갔다며? 너도 할 수 있어."
위로의 말이었지만 어쩐지 더 가슴이 아팠다. '옆집 최씨네 아들'과의 비교는 3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국민대 출신의 최씨네 아들은 내게 늘 비교 대상이었다. 부모님은 악의가 없었다. 그저 아들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내 자존감에 조금씩 금을 갔다.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잘 먹고 있어요."
전화를 끊고 강남의 한 카페로 발길을 돌렸다. 대기업 취준생들의 성지라 불리는 그곳은 예상대로 노트북을 펴놓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화면에는 자기소개서 양식, 필기시험 준비 문제집, 블라인드 채용 정보 사이트가 띄워져 있었다. 모두가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다. 5,500원. 취준생에겐 작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이것이 내가 하루종일 머물 수 있는 공간의 대여료였다. 노트북을 펴고 자동으로 잡코리아와 사람인 사이트를 열었다. 채용공고 페이지는 내 인터넷 브라우저의 첫 화면이었다.
"준호야!"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대학 동기 이민우였다. 그는 2년 전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명색이 토요일인데도 정장 차림이었다.
"야, 오랜만이다. 여기서 뭐해?"
"뭐하겠어, 취준 중이지. 넌 이 시간에 출근이야?"
민우는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거래처 미팅 왔다가 가는 길이야. 주말에도 일하니까 미쳐버리겠다."
그의 얼굴은 학창 시절 그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내심 '취업을 해도 저렇게 사는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다가, 곧 스스로의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요즘은 어때? 아직 S전자 쫓아다니는 중이야?"
"오늘 또 떨어졌어."
"아, 그래? 미안하다. 근데 넌 아직도 그 회사만 고집하냐? 중소기업도 괜찮은 데 많아. 우리 회사도 사람 뽑는데..."
말끝을 흐리는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제안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중소기업? 부모님의 기대, 3년간의 노력, 그리고 현실적인 임금 차이까지... 선뜻 수긍하기 어려웠다.
"고마워 민우야. 근데 솔직히 아직은... 좀 더 도전해보고 싶어."
민우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커피를 마셨다. 학창 시절엔 내가 더 성적이 좋았고, 리더십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는 직장이 있고, 월급이 있고, '사회인'이라는 타이틀이 있었다. 비교는 언제나 잔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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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어 소연이를 만났다. 2년 전 취업 스터디에서 만난 그녀는 이제 K은행의 대리였다. 우리의 관계는 묘했다. 데이트 비용은 주로 그녀가 냈다. 남자인 내가 계산할 때면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 지갑 사정을 아는 그녀의 배려가 묻어났다.
"오늘도 안 됐구나."
소연이가 내 표정을 보자마자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준호야, 너무 낙담하지 마. 넌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
그녀의 위로가 오히려 날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좋은 사람? 그게 무슨 의미일까? 사회는 '좋은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스펙이 좋고, 능력 있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람을 원할 뿐이다.
"소연아, 가끔 생각해. 내가 뭘 위해 이렇게 사는지."
식사를 하며 문득 그런 말이 나왔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다.
"무슨 뜻이야?"
"대기업 입사가 내 인생의 최종 목표였나? 모두가 그걸 원하니까 나도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소연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준호야, 솔직히 말할게. 네가 요즘 너무 자신감을 잃은 것 같아. 취업은 정말 운도 따라야 해. 하지만 그렇다고 네 인생의 방향을 바꿀 필요는 없어. 대기업은 단순히 돈뿐만 아니라 안정성, 미래를 보장해주는 거잖아."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런데 그 안정성을 위해 내 20대의 마지막 몇 년을 전부 써버리고 있어. 3년 동안 계속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자기소개서를 쓰고, 같은 꿈만 꾸고 있는 거야."
소연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준호야, 그럼 대안이 뭔데? 그냥 포기할 거야? 이렇게 말하기 싫지만, 네 상황은 쉽지 않아. 28살 지방대 남자... 지금 포기하면..."
말을 멈추는 소연이를 바라보았다. 사랑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냉정한 현실 인식. 그녀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내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미안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냐."
"아니야, 네 말이 맞아. 내가 현실을 직시해야지."
식사 후, 우리는 어색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소연이와 나 사이에 놓인 간극은 단순히 취업 여부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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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3평 남짓한 공간은 갑갑했지만, 월세 35만원에 서울 중심가에서 잘 곳을 구하기엔 이것이 최선이었다. 벽 너머로 누군가의 코골이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키보드 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작은 공간들 속에 얼마나 많은 꿈과 절망이 공존하고 있을까?
침대 옆 책상에는 자기계발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루 만에 끝내는 NCS 기출문제', '합격자들의 면접 비법', '인사담당자가 말하는 자소서 작성법'... 3년간 모은 책들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100번도 넘게 수정한 자기소개서 파일이 담긴 노트북.
휴대폰을 들어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피드에는 친구들의 회사 생활, 해외여행, 신혼부부의 일상이 가득했다. 아직도 취준생인 나는 SNS에 올릴 내용조차 없었다. 마지막 게시물은 1년 전, S전자 인턴 수료식 사진이었다. 그때는 정규직 전환의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 문은 너무나 좁았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다. 서울은 잠들지 않았다. 야근하는 직장인, 공부하는 학생, 그리고 나처럼 미래를 고민하는 청년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메모장을 열었다. 3년째 써온 취업 일지였다. 면접 후기, 느낀 점, 개선할 점 등을 적어왔다. 오늘의 면접에 대해 쓰려다 문득 다른 문장이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갑작스러웠지만, 사실 오랫동안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대기업 취업이 정말 내 꿈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사회와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표였을까?
경영학과를 선택한 것도, 토익 공부를 시작한 것도, 모두 '안정적인 미래'라는 이름 아래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 안정은커녕 끝없는 불안 속에 살고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앉아 생각했다. 대학 시절 정말 즐겁게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학과 동아리에서 중소기업 마케팅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였다. 작은 가구 공방의 온라인 마케팅 전략을 짜고, 실제로 그들의 매출이 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희열. 당시엔 그것이 '진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삼성, 현대, LG... 그런 곳에 가야 성공한 것이라 여겼다.
그날 밤, 오랜만에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대기업의 명함이 아니라,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 내 능력으로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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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웠다. 오늘부터 뭔가 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일단은 대학 동아리 선배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는 작은 마케팅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준호야, 오랜만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
"선배,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3년째 대기업만 노리다 보니..."
"그렇구나. 들었어, 너 S전자 인턴도 했었다며? 정규직은 안 된 거야?"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선배,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일 있으세요? 무보수라도 좋으니, 실제 프로젝트에 참여해보고 싶어요."
선배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마침 중소기업 지원 프로젝트 하나 시작하는데, 인력이 부족했어. 관심 있어?"
그날 오후, 선배의 작은 사무실을 찾았다. 강남의 화려한 대기업 건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피스텔을 개조한 공간에는 선배를 포함해 5명의 직원이 있었다. 그들은 지역 중소기업의 디지털 마케팅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40년 된 전통 수제화 공방이야. 기술은 좋은데, 온라인 마케팅을 전혀 모르셔. 너희 동아리에서 비슷한 프로젝트 했다고 들었는데, 아이디어 있어?"
선배의 질문에 내 머릿속이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대학 시절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그때의 열정, 창의성, 그리고 성취감...
"네,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어요!"
처음으로 자기소개서가 아닌 실제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는 내 목소리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넘쳤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2주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보수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성취감은 값을 매길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제안한의 아이디어를 보고 공방 사장님이 환하게 웃을 때의 그 순간은 그 어떤 합격 통지보다 값졌다.
"준호야, 너 생각보다 이런 일에 소질이 있더라."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던 날, 선배가 말했다.
"사실 우리 회사 곧 한 명 더 뽑으려고 해. 관심 있어? 대기업만큼 급여는 못 줘. 하지만 네가 직접 프로젝트 리드할 기회는 충분히 줄 수 있어."
순간 망설였다. 월급은 대기업의 절반도 안 될 것이다. 부모님께 어떻게 설명할지, 그리고 소연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하지만 지난 2주간 느낀 그 생동감과 의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선배. 정말 관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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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한강공원에 앉아 있었다. 이제 나는 작은 마케팅 회사의 직원이 되어 있었다. 부모님께 설명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갔을 때, 예상외로 아버지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아들아, 네가 행복하다면 그게 중요한 거야. 아버지 세대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어. 하지만 너희는 다르잖아."
어머니도 처음엔 걱정하셨지만, 내 얼굴에서 오랜만에 활기를 찾아보셨는지 점차 수긍하셨다.
소연이와는... 결국 헤어졌다. 그녀는 내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 역시 그녀의 가치관을 바꿀 수 없었다. 아프지만, 서로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한강의 물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인생이 갑자기 완벽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좁은 고시원에 살고 있고, 월급도 넉넉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출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우산을 준비해왔다. 인생도 이와 같을까? 준비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 스펙이라는 우산만이 인생의 비를 막아주는 유일한 도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던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새 게시물을 올렸다.
"새로운 시작. 스펙 이상의 것을 찾아서."
사진은 내 새 회사 명함과 작은 화분이었다. 회사 분위기상 자유롭게 내 명함을 디자인할 수 있었고, 그 위에는 '김준호, 프로젝트 매니저'라고 적혀 있었다. 화분은 입사 첫날 선배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네 성장을 지켜보고 싶어"라는 메시지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었다. 이번에는 비가 그렇게 슬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내일은 또 다른 중소기업 프로젝트 미팅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꿈을 함께 이루어가는 일.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스펙 이상의 것'이었다.
꿈은 꾸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루라고 있는 것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 꿈이 진짜 내 꿈인지 확인하는 것, 그것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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